2014년 3월 11일 화요일

'부채(liabilities)의 인간학' 서론 - 2014. 3. 11.

  내게 글은 머릿 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들을 풀어내기 위한 최소한의 배설 장치이다. 6개월이 넘도록 장치가 멈춘 채 실들만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났으니, 내 머리가 얼마나 심한 변비에 걸렸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실 뒤엉킨 실타래를 제대로 풀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실의 끝 부분을 잡고 아무리 조심스럽게 혼돈의 근원을 추적한다 하더라도, 돌아오는 거라곤 멀쩡했던 실들이 창의적으로 만들어 낸 새로운 혼돈일 뿐이다. 그리고는 끝내 자신의 쓸데없는 고생을 자책하며 실타래를 내던지게 된다. 하지만 생각은 무한히 새로운 실들을 공급하기에 내팽개쳐진 실타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개인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혼돈에 직면하게 된다.

  한 편,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해결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실타래 한 가운데를 가위로 싹둑 잘라내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혼돈의 근원을 추적하는 것과 혼돈을 가위로 자르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전자에는 얽힌 실을 풀어 본래 온전한 실의 모습을 되찾아 사용하겠다는 본질주의적인 전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실 본연의 가치가 중시되며, 얽힌 실타래를 본래 바람직한 모습으로 회복시켜가는 과정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에 반해 후자에는 잘라낸 실들을 통해 활용 가능한 방안을 찾겠다는 실용주의적인 전제가 자리잡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일종의 해체 작업을 통해 얽혀져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활용할 수 있는 실들을 선별해내거나 부족한 실들을 묶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더 중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과 비유가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어떤 방법이 더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관점이나 상황에 따라 상이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꼬여 있던 실타래를 풀어내려다 길을 잃었던, 그리고 일종의 완벽주의와 이상주의를 견지해 온 내게는 적어도 후자의 경험이 더 큰 울림을 가져다 주었다. 내팽개쳐져 있던 내 생각의 실타래에 메스를 대 준 절친한 친구 최 군에게 이 글을 바친다.

  실타래에서 잘려져 나온 실도 여전히 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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