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일 월요일

화이트데이 옴니버스 멜로 - 2013. 3. 14.

  나는 평소 여러 이야기들이 합쳐지는 옴니버스식 멜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뻔히 예상되는 정형화된 스토리 때문이기도 하고, 여러 이야기들을 하나의 결말로 수렴시키며 묶어가는 인위적인 연출이 감정이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신기하게도 내 눈앞에서 그런 흔하디 흔한 옴니버스 멜로 영화가 펼쳐졌다. 

1.
  여인은 누가 봐도 자연스레 시선이 갈 정도로 근사하게 차려입었다. 검정 원피스, 검정 스타킹, 검정 킬힐, 그리고 마무리는 빨강 트렌치 코트. 다소곳하게 서있는 자세와 달리 그녀의 표정과 몸짓에선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진다. 순간 한 남자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여자는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남자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온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여자는 남자가 화장실에 가자 재빨리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친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조금은 불편해보이는 상기된 표정은 그녀가 느끼는 설렘을 쉽게 짐작케 한다. 거기에 조금 과한 악세서리를 매만지다 남자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는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2.
  바로 앞 테이블의 남녀는 마주 앉아 서로의 노트북을 응시한다. 아주 잠깐이다. 남자의 시선은 노트북에서 끊임없이 그녀로 옮겨간다. 노트북, 그녀, 노트북, 그리고 다시 그녀. 남자가 계속 이런 안구 운동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내게 등을 돌리고 앉은 그녀는 지금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여자에게 말을 걸고, 뭐가 그리 좋은지 고개를 숙이고 등까지 들썩이며 웃어댄다. 진정하고 노트북을 보던 남자의 시선은 다시 그녀, 노트북, 그녀, 노트북, 그리고 그녀에게 이르러 끝내 말을 걸고 만다. 그리곤 아까와 같은 함박웃음을 짓는다. 창문을 통해 반사되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도 무척이나 밝다. 그저 좋은,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는 두 남녀다.

3.
  저기 건너편에 앉아 있는 두 남녀는 대화는 커넝,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나란히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각자의 책과 노트북을 응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둘은 누가 보아도 커플이다. 말 한 마디 오가지 않고, 눈길조차 교환하지 않아도, 그 둘 사이에는 커플로밖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문득, 두 남녀는 처음으로 눈빛을 교환한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듯이, 겉옷을 간단히 챙겨입고 밖으로 향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두 남녀의 손에는 담배가 쥐어져있다. 담배를 펴본 적도 없고 좋아하지 않지만, 회상컨대 담배연기가 두 남녀가 그려낸 오늘처럼 아름답게 느껴진 적은 없다. 담배 한대를 태우는 동안 환하게 웃던 남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돌아와 아까처럼 고개를 쳐박고 각자의 일에 몰두한다. 역시나 둘 사이엔 누가 봐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다.

4.
  집에 들어가기 전, 나는 또 다시 커피 한 잔이 고파 자주가는 카페에 들렀다. 이미 마실 커피를 정하고 주문 순서를 기다리던 나는 점차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약간 짜증이 났다. 바로 앞에 서 있었던 남자 때문이었다. 눈치를 주기도 했지만, 그는 내가 주는 눈치를 느끼기엔 너무 정신이 없어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는 계산대 옆에 진열되어 있는 조각 케익을 고르고 있었다. 도저히 조각 케익 하나를 고르는 시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을 소모한 뒤, 남자는 포장된 조각 케익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그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옆에 서성거리며 뭔가를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내가 주문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는 조심스레 점원에게 다가가 혹시 초를 얻을 수 있냐고 물었고, 점원이 챙겨준 초를 챙겨 넣고 자리를 떴다.

  오늘은 3월 14일 화이트데이다. 카페가 마감시간에 다다른, 화이트데이가 끝나가는 늦은 시 각, 정말 엉망진창이고 너무나도 서툴러보이는 그에게서 나는 진한 여운을 느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을 통해, 나는 그가 오늘 하루, 아니 그 이전부터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 설렘을 느꼈을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고작 조각 케익 하나에 초 하나였지만, 그에겐 용기이자, 결단이자, 사랑이었다. 그 조각 케익의 주인은 남자의 그런 고뇌와 떨림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앞으로도 내가 이러한 포맷의 멜로 영화를 좋아한다거나 즐겨 볼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오늘 내가 보고 직접 느낀 감정을 어떤 비슷한 영화도 줄 수 없을 것을 알기에, 실은 볼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감독이 어떤 아름다운 그림들을 담고자 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나는 혼자여서 외롭지만, 아름다운 화이트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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