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1일 화요일

'부채(liabilities)의 인간학' 서론 - 2014. 3. 11.

  내게 글은 머릿 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들을 풀어내기 위한 최소한의 배설 장치이다. 6개월이 넘도록 장치가 멈춘 채 실들만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났으니, 내 머리가 얼마나 심한 변비에 걸렸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실 뒤엉킨 실타래를 제대로 풀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실의 끝 부분을 잡고 아무리 조심스럽게 혼돈의 근원을 추적한다 하더라도, 돌아오는 거라곤 멀쩡했던 실들이 창의적으로 만들어 낸 새로운 혼돈일 뿐이다. 그리고는 끝내 자신의 쓸데없는 고생을 자책하며 실타래를 내던지게 된다. 하지만 생각은 무한히 새로운 실들을 공급하기에 내팽개쳐진 실타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개인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혼돈에 직면하게 된다.

  한 편,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해결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실타래 한 가운데를 가위로 싹둑 잘라내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혼돈의 근원을 추적하는 것과 혼돈을 가위로 자르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전자에는 얽힌 실을 풀어 본래 온전한 실의 모습을 되찾아 사용하겠다는 본질주의적인 전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실 본연의 가치가 중시되며, 얽힌 실타래를 본래 바람직한 모습으로 회복시켜가는 과정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에 반해 후자에는 잘라낸 실들을 통해 활용 가능한 방안을 찾겠다는 실용주의적인 전제가 자리잡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일종의 해체 작업을 통해 얽혀져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활용할 수 있는 실들을 선별해내거나 부족한 실들을 묶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더 중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과 비유가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어떤 방법이 더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관점이나 상황에 따라 상이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꼬여 있던 실타래를 풀어내려다 길을 잃었던, 그리고 일종의 완벽주의와 이상주의를 견지해 온 내게는 적어도 후자의 경험이 더 큰 울림을 가져다 주었다. 내팽개쳐져 있던 내 생각의 실타래에 메스를 대 준 절친한 친구 최 군에게 이 글을 바친다.

  실타래에서 잘려져 나온 실도 여전히 실이다.

2013년 6월 3일 월요일

화이트데이 옴니버스 멜로 - 2013. 3. 14.

  나는 평소 여러 이야기들이 합쳐지는 옴니버스식 멜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뻔히 예상되는 정형화된 스토리 때문이기도 하고, 여러 이야기들을 하나의 결말로 수렴시키며 묶어가는 인위적인 연출이 감정이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신기하게도 내 눈앞에서 그런 흔하디 흔한 옴니버스 멜로 영화가 펼쳐졌다. 

1.
  여인은 누가 봐도 자연스레 시선이 갈 정도로 근사하게 차려입었다. 검정 원피스, 검정 스타킹, 검정 킬힐, 그리고 마무리는 빨강 트렌치 코트. 다소곳하게 서있는 자세와 달리 그녀의 표정과 몸짓에선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진다. 순간 한 남자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여자는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남자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온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여자는 남자가 화장실에 가자 재빨리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친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조금은 불편해보이는 상기된 표정은 그녀가 느끼는 설렘을 쉽게 짐작케 한다. 거기에 조금 과한 악세서리를 매만지다 남자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는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2.
  바로 앞 테이블의 남녀는 마주 앉아 서로의 노트북을 응시한다. 아주 잠깐이다. 남자의 시선은 노트북에서 끊임없이 그녀로 옮겨간다. 노트북, 그녀, 노트북, 그리고 다시 그녀. 남자가 계속 이런 안구 운동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내게 등을 돌리고 앉은 그녀는 지금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여자에게 말을 걸고, 뭐가 그리 좋은지 고개를 숙이고 등까지 들썩이며 웃어댄다. 진정하고 노트북을 보던 남자의 시선은 다시 그녀, 노트북, 그녀, 노트북, 그리고 그녀에게 이르러 끝내 말을 걸고 만다. 그리곤 아까와 같은 함박웃음을 짓는다. 창문을 통해 반사되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도 무척이나 밝다. 그저 좋은,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는 두 남녀다.

3.
  저기 건너편에 앉아 있는 두 남녀는 대화는 커넝,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나란히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각자의 책과 노트북을 응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둘은 누가 보아도 커플이다. 말 한 마디 오가지 않고, 눈길조차 교환하지 않아도, 그 둘 사이에는 커플로밖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문득, 두 남녀는 처음으로 눈빛을 교환한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듯이, 겉옷을 간단히 챙겨입고 밖으로 향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두 남녀의 손에는 담배가 쥐어져있다. 담배를 펴본 적도 없고 좋아하지 않지만, 회상컨대 담배연기가 두 남녀가 그려낸 오늘처럼 아름답게 느껴진 적은 없다. 담배 한대를 태우는 동안 환하게 웃던 남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돌아와 아까처럼 고개를 쳐박고 각자의 일에 몰두한다. 역시나 둘 사이엔 누가 봐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다.

4.
  집에 들어가기 전, 나는 또 다시 커피 한 잔이 고파 자주가는 카페에 들렀다. 이미 마실 커피를 정하고 주문 순서를 기다리던 나는 점차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약간 짜증이 났다. 바로 앞에 서 있었던 남자 때문이었다. 눈치를 주기도 했지만, 그는 내가 주는 눈치를 느끼기엔 너무 정신이 없어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는 계산대 옆에 진열되어 있는 조각 케익을 고르고 있었다. 도저히 조각 케익 하나를 고르는 시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을 소모한 뒤, 남자는 포장된 조각 케익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그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옆에 서성거리며 뭔가를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내가 주문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는 조심스레 점원에게 다가가 혹시 초를 얻을 수 있냐고 물었고, 점원이 챙겨준 초를 챙겨 넣고 자리를 떴다.

  오늘은 3월 14일 화이트데이다. 카페가 마감시간에 다다른, 화이트데이가 끝나가는 늦은 시 각, 정말 엉망진창이고 너무나도 서툴러보이는 그에게서 나는 진한 여운을 느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을 통해, 나는 그가 오늘 하루, 아니 그 이전부터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 설렘을 느꼈을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고작 조각 케익 하나에 초 하나였지만, 그에겐 용기이자, 결단이자, 사랑이었다. 그 조각 케익의 주인은 남자의 그런 고뇌와 떨림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앞으로도 내가 이러한 포맷의 멜로 영화를 좋아한다거나 즐겨 볼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오늘 내가 보고 직접 느낀 감정을 어떤 비슷한 영화도 줄 수 없을 것을 알기에, 실은 볼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감독이 어떤 아름다운 그림들을 담고자 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나는 혼자여서 외롭지만, 아름다운 화이트데이다.

2013년 5월 23일 목요일

솔로와 커플의 걸음걸이 : 뒤틀린 사랑학개론

프롤로그


  오늘 필자의 시야에 포착된 창밖의 행인들은 크게 두 부류이다. 솔로, 혹은 커플. 시야는 한정되어 있기에, 한 곳을 응시하면 자연스레 일정한 거리의 동일한 경로를 움직이는 각기 다른 행인들을 관찰할 수 있다. 본인의 취미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멍 때림'이라 불리는 종류의 관찰은 이따금 의도치 않은 사고의 촉발을 야기하곤 한다. 

  잠깐,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사랑은 왜 '좋은(good)' 것일까? 혹시 사랑이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필자의 직관을 풀어 쓰고자 하는 이 이야기가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음을 미리 일러둔다. 평소 이상주의자 혹은 낭만주의자라고 생각한 필자 본인 역시 오늘은 조금 불편함을 느꼈으니까.

Ⅰ. 솔로와 커플의 걸음걸이


  솔로의 걸음과 커플의 걸음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우선, 솔로는 혼자, 그저 열심히 걷는다. 여기서 '열심히'는 솔로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수사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잠시 뒤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반면, 커플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혹은 어깨동무를 하거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서로 몸을 기대어 걷는다. 또한 솔로는 주로 정면을 바라보며 상대적으로 빠르게 걷는다. 이에 반해, 커플은 서로를 얼굴, 하늘, 땅 등을 둘러보며 비교적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혹자는 그런 게 뭐 대단한 관찰이냐며 비웃을 법한, 생각해 보면 참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멍을 때리는 필자에게 행인들의 걸음걸이는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분절적인 동작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관찰이 되었다.

  먼저 솔로의 걸음걸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독자 본인이 혼자 걷는 것을 떠올려 보아도 괜찮다. 딱 한 걸음만, 가령 오른 발을 아주 천천히 한 발 내딛어보자. 그러면 자연히 왼 발은 다음 걸음을 위해 공중에 떠 있게 되는데, 이 경우 몸은 자연히 오른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러한 동작을 아주 천천히 수행한다고 상상해보면, 기울어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온 힘을 집중하고 있는 오른 다리에 벌써 쥐가 날지도 모르겠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당신은 재빨리 공중에 있는 왼 발을 지면에 내딛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왼 발이 땅에 닿으면? 방향만 바뀌었을 뿐 다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서둘러 오른 발을 내딛어야 하며, 이러한 동작들을 반복하게 된다. 즉, 솔로는 한 걸음 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온 신경과 근육들이 몸이 기울어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일종의 반작용처럼 힘을 작용시킨다. 즉, 우리 몸을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세로로 반을 나누는 중심축으로부터, 한 걸음 뗄 때마다 좌우로 기울어지는 몸을 스스로 다시 중심축으로 끌어오려 애쓰며 걷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솔로가 앞을 보고, 빠르게, 그리고 열심히 걸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번엔 커플의 걸음걸이를 살펴보자. 아마 솔로의 걸음걸이와 비교해서 생각하면 비교가 쉽게 될 것이다. 앞서 필자가 제시했던 커플들의 걷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왼 쪽엔 여성, 오른 쪽엔 남성이 서로의 몸을 기대어 걷고 있다.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커플은 걸을 때 솔로에 비해 반만 힘을 쓰면 된다. 중심축으로부터 튕겨나가는 자신의 몸을 부여잡을 필요 없이, 여성은 오른쪽으로, 남성은 왼쪽으로 기울여 균형을 맞추면 된다. 커플의 걸음걸이에 있어 중심축은 두 개인 사이에, 바꿔 말하면 개인의 관점에서 외부에 존재하게 된다. 즉, 서로 합의된 균형축을 임의로 설정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걸음으로써 개인의 피로를 더는 것이 바로 커플들의 걸음 속에 숨겨진 의미이다. 커플들이 여유롭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Ⅱ. 사랑의 본질과 속성


  지금까지 솔로와 커플들의 걸음걸이에 대해 거창하게 이야기 한 것은, 걷기 운동에 숨겨진 물리적 법칙에 대해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바로 사랑으로 상징되는 남녀 간의 관계를 비유하고자 함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랑'은 본질적으로 좋거나 (good) 아름답다(beautiful)기보다는 '이로운 (helpful or beneficial)' 것이다. 그리고 그 이로움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한 솔로와 커플들의 걸음에 대한 비교를 통해 쉽게 유추해낼 수 있다. 개인은 자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흔들리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살아가는 위태로운 존재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 일생의 여정은 위험하고, 불안하고, 상당한 피로를 수반한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역사적으로 개인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무언가를 창조함으로써 발전을 이룩했다. 우리가 동시대에 사랑이라 부르는 가치 혹은 개념 또한 인간의 생존에 이로운 창조물에 다름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로운 기제를 지속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착색시킨 개념이 바로 '선(good, 善)'이나 '아름다움(beauty)'이다.

  한 편, 커플들의 걸음걸이가 가지는 특징들을 통해 사랑의 속성을 유추해낼 수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두 개인 간의 힘의 균형이다. 커플들은 어딘가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데, 의도한 방향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균형이란 50:50이라는 절대적인 균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커플이 왼쪽으로 가고자 한다면, 오른 편에 있는 사람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한다. 반대로 커플이 오른쪽으로 가고자 한다면 왼 편에 있는 사람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한다. 만약 두 개인의 힘이 동등한 채로 힘겨루기가 지속된다면, 그 커플은 영원히 직진뿐이 할 수가 없다. 즉, 양자가 합의한 방향으로 가는 과정의 길목마다 적합한 중심을 찾아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사랑에 있어 힘의 균형이다.

  또 다른 사랑의 중요한 속성으로는 두 개인 간의 템포의 균형을 들 수 있다. 커플이 서로의 몸을 맞대고 기대서 걸어갈 수 있는 것은 각자 한 걸음씩 내딛는 속도가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만약 커플이 원하는 방향으로 보다 빨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두 사람 모두의 걸음이 빨라져야 한다. 또 보다 천천히 여유롭게 나아가려면, 두 사람 모두 걸음의 템포를 늦춰야만 그것이 가능하다.

  마지막 사랑의 중요한 속성은 커플이 형성하는 중심축의 균형이다. 앞서 잠깐 설명했듯이, 커플이 걸을 때 생기는 중심축은 각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게 되는데, 각 커플이 만들어내는 중심축과 몸과의 기울기는 제각기 다르다. 즉, 어떤 커플은 거의 몸을 기울이지 않고 중심축과 수평으로 맞닿아 걷는가 하면, 어떤 커플은 서로의 몸을 중심축에 직각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게 기울여 기대고 걷는다. 이 때, 커플들이 걸을 때 형성되는 중심축은 지면과 수직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는 곧 두 사람이 중심축과 만들어내는 각도가 일치함을 이야기한다.

  특히 중심축의 균형이라는 속성에서는 사랑이 이로움을 위한 것임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 이유는 개인에게 균형의 대상이 결국 상대방이 아니라 중심축이라는 인위적인 합의점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중심축과 몸이 이루는 기울기는 사랑의 깊이 혹은 강도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로움이라는 사랑의 본질이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들로 착색되는 정도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즉, 몸이 중심축으로부터 기울어지는 정도가 심할수록 본래의 이로움이라는 목적이 개인들에게 점차 가치들로 인식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세 가지 균형들은 사랑을 이로운 것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으로서, 개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유지하고 지속하도록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Ⅲ. 이별


  힘, 템포, 그리고 중심축의 균형이라는 중요한 사랑의 속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별이란 쉽게 말해 이러한 균형이 깨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균형이 깨지는 이유란 자질구레한 것들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사랑이 개인에게 더 이상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별이라는 균형의 해체에는 필연적으로 최초의 균형을 깨는 행위와 그 주체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균형이 깨지면 균형에 의지해 걷고 있던 다른 사람은 넘어지게 된다. 흔히 이별의 과정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표현이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에 기인하는 것이다. 특히 개인이 중심축에 기대고 있던 기울기가 클수록 더 세게 넘어진다는 점은, 다시 말해 이로움이라는 목적을 잊고 사랑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했을수록 이별의 상처가 더 크게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별에도 상처의 최소저지선이 존재한다. 이는 이로움을 위해 존재하게 된 사랑의 필연적 속성, 그 중에서도 중심축 균형의 속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 말인즉슨, 이별로 인해 해체된 균형의 중심축이 적어도 내 자신의 중심축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가질 수 있는 개인의 균형은 항상 유보적인 형태로 유지시켜두고, 이별을 잠재적으로 잉태하는 사랑에 있어 해체가 가능한 중심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둔 것이다. 아무리 큰 이별의 상처를 받았더라도,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시 개인이 본인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가치로 착색된 환상이 이로움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완전히 압도해 넘어진 뒤에 일어나지 못하는 예외는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것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또 하나 이별에 있어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균형을 깨트린 사람 역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균형은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기대어 만들어내는 복잡한 역학관계로 구성되며, 이러한 균형은 이로움이라는 강력한 목적으로부터 상당한 관성을 지니게 된다. 즉, 이러한 균형의 관성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균형과는 다른 힘, 템포, 그리고 중심축에의 기울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이로움을 위한 사랑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 역시 이로움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Ⅳ. 짝사랑


  이별이 균형을 해체하는 것이라면, 이와는 반대로 사랑의 시작은 균형을 창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균형의 창조는 역시 이로움이라는 굳건한 사랑의 본질적인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사랑의 시작은 앞서 이야기한 이별의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 균형의 창조에도 역시 두 개인 간의 최초의 접점을 발생시키는 행위와 그 주체가 존재한다.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개인은 각자의 중심축에 맞추어 삶에 있어 각기 다른 힘과, 템포, 그리고 기울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즉, 균형을 위해서는 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삶의 무늬가 어우러지기 위한 계기가 필요한데, 이러한 사랑의 시작 역시 이별과 같이 경험적으로 두 가지 유형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서로 다른 두 개인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중심축으로 수렴하는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힘, 템포, 그리고 기울기에 어느 정도 맞춰가는 경우이다. 이 때, 후자가 우리가 흔히 짝사랑이라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균형의 창조를 우해 짝사랑을 행하는 주체는 균형의 관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별에 있어서 균형을 깨뜨리는 사람과 비슷하다. 짝사랑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개인의 균형을 벗어나 타인의 중심축에 맞춘다는 점에서 역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짝사랑이 힘든 것은 개인의 균형을 깰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며, 짝사랑이 아픈 이유는 개인의 균형이 깨지면서 야기되는 일종의 후유증 때문인 것이다.

에필로그


  사랑은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다. 마치 커플의 걸음걸이와도 같이, 사랑이 갖는 특성들은 교묘하게 우리의 이로움을 위해 존재한다. 사랑이 개인의 이기적이라 표현할 수 있는 이로움을 위한 것임은 불편하지만 사랑이 갖는 진실이다.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 또한, 그것이 우리 개인의 생존에 이로운 것임을 전제로 하며,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랑의 궁극적인 본질이 아름다움이 아닌 이로움이라고 해서,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생존에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행위는 인간이 가장 본능적으로 추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사랑을 위해 개인은 최선을 다해 노력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짝사랑도, 연인과 함께하는 현재의 사랑도, 그리고 이별도 모두 어렵다. 그것은 개인이 생존의 이익을 위해 벌이는 치열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그것의 존재와 가치를 회의하기보다,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굳건한 원천으로 기능할 것이다.

2013년 5월 7일 화요일

어제 오늘 그리고 : 목적, 비전, 사명, 목표 - 2013. 5. 7.

1.
  언젠가부터 지인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털어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필자는 운이 좋게도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생각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인생에 대한 고민에 대해서는 물론 정답도 없거니와 답을 해줄 능력도 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레 본인은 듣는 것에 집중하며 사람들이 던지는 고민 자체를 고민하게 되었다. 여러 주체들의 인생의 폭과 깊이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들의 고민은 신기할 정도로 하나의 진부한 이미지로 수렴했으니,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처럼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며 위태롭게 흔들리는 돗단배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필자 본인의 모습이기도 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이미지를 글로 풀어보자면, 방향의 상실 혹은 불확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한 편, 이러한 표현이 문제의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토대라면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고민은 '성취'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었다. 무언가 목적한 바를 이룬다는 뜻의 성취의 문제가 어떻게 인생에 있어 방향의 상실로 연결되며, 우리에게 불안을 야기하는지를 고민하던 찰나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목적이란 과연 무엇일까?

  목적, 비전, 사명, 목표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다양하게 사용하는 어휘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각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네 가지 개념 모두 주체의 성취 행위와 관련이 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지만, 구체적인 의미와 행위의 단계 측면에서 차이점을 갖기 때문에 각각의 사전적 정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목적은 각 개념에 대한 필자의 성찰을 공유함으로써, 독자들이 성취와 관련해 살면서 갖게 되는 답답함과 불안을 해소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화두를 던지고자 함이다.

2.
  우선 ‘목적’은 ‘실현하려고 하는 일이나 나아가는 방향’을 의미한다. ‘목적’의 번역어라 할 수 있는 ‘purpose’의 사전적 정의는 ‘The purpose of something is the reason for which it is made or done.’이다. 이 때, ‘이유’ 혹은 ‘근거’를 의미하는 ‘reason’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그 정의를 파악해보면, ‘목적’이란 주체가 존재하고 만들어진 이유에 관한 존재론적 인식이다. ‘목적’은 한자로 ‘目的’인데 여기서 ‘的’은 구체적으로는 과녁을 나타내고, 내포적으로는 ‘참, 진실’을 의미한다. 화살을 쏘는 행위에 있어 과녁이란 활쏘기가 존재하기 위한 이유로서, 그 전체의 과정을 관통하는 궁극의 지점이자 존재론적 선(善, 옳음)의 가치를 갖게 된다. 결국 ‘목적’이란 그 존재 자체에 관한 답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전’은 사전상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 이상, 전망’을 의미하며, 그 번역어인 ‘vision’은 ‘Your vision of a future situation or society is what you imagine or hope it would be like, if things were very different from the way they are now.’을 사전적 정의로 한다. ‘비전’의 한글과 영문의 정의에서 공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개념은 ‘시점’과 ‘시각화’이다. 즉, ‘비전’은 기본적으로 현재 시점에서 미래의 상황을 시각화시킨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한 편, 시각화라는 개념에는 비전을 도출해내는 대상이 추상적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비전의 개념을 위에서 살펴본 목적의 정의와 연결시켜 이해해보면, 비전은 현재라는 시점과 목적으로 ‘나아가는 방향 혹은 과정’이라는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궁극의 존재 이유라는 미래의 추상적 상황을 가시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시각적으로 그려내는 과정 속에는 주체의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에, 비전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관념적 속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에서 관념이란 '목적'의 추상적인 존재론적 질문과 답을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나타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시각화’의 개념과 모순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사명’은 한글로는 ‘맡겨진 임무’를 의미하며, 번역어인 ‘mission’의 사전적 정의는 ‘A mission is an important task that people are given to do.’이다. ‘사명’이라는 개념 역시 한글과 영어의 정의에서 공통적인 개념이 도출되는데, 그것은 ‘임무’와 ‘주어짐’이다. 즉 사명이란 관념적 측면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한 것이며, 이는 행위의 주체에게 주어지게 된다. 이 때, 사명을 갖는 주체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비전’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명은 한자로 ‘使命’인데 ‘使’는 ‘하여금’이라는 사역형을 나타내고 ‘命’은 ‘목숨, 운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달리 말하면, 사명이란 주체로 하여금 무언가를 운명처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주체의 신념과 믿음을 근간으로 하게 되며 이는 이념과 같은 관념의 작용에 기인하는 것이다. 바로 사명이란 그 한글 정의에서 ‘비전에 의해’라는 말이 앞에 생략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목표’는 사전에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지향하는 실제적 대상으로 삼음. 또는 그 대상.’으로 정의하며, 번역어인 ‘goal’은 ‘Something that is your goal is something that you hope to achieve, especially when much time and effort will be needed.’을 의미한다. ‘목표’에서는 정해진 대상에 대한 실제적인 성취를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 목표는 한자로 ‘目標’인데 ‘標’는 ‘표하다, 나타내다’라는 의미로,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실행 가능한 행동의 차원으로 나타내는 것을 가리킨다. 목표를 사명의 개념과 연결시켜보면, 주체가 자신에게 비전에 의해 주어진 임무를 인식하고, 이를 실질적인 성취 행위 차원에서 나타낸 것을 ‘목표’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각 개념들의 차이를 사전적 정의를 통해 분석한 결과, 목적, 비전, 사명, 목표는 주체가 지향점을 성취해가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구성하는 각기 다른 차원의 개념 집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목적, 비전, 사명, 목표의 순으로 나아갈수록 추상적 차원에서 구체적 차원으로, 관념적 차원에서 행위적 차원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단기적 관점으로 구분됨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목적에서 목표로 나아감에 있어, 각각 그 상위 혹은 전위 차원의 개념은 그 하위 혹은 후위 차원의 개념의 전제로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상위 개념은 하위 개념의 ‘why’에 대한 답이고, 하위 개념은 상위 개념의 ‘how’에 대한 답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3.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하고 있는 고민들의 한계는 단지 현상적인 목표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목표에 대해 'why'를 묻지 않고, 계속해서 'how'를 생각한다. 목표의 'why'에 대한 답, 즉 '사명'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비록 'how'를 찾아 그 목표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이는 하나의 독립적인 사건(event)에 불과할 뿐 인생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기 힘들다. 우리가 갖는 불안과 답답함은 목표의 'why'로서 사명, 사명의 'why'로서 비전, 비전의 'why'로서 목적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데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하는 성취의 고민은 최상위의 목적으로 거슬러 올라간 뒤, 다시 목표의 차원으로 내려올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가령 아름다운 모양을 이루며 무한히 계속되는 도미노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지금 쓰러지고 있는 가장 마지막 도미노 조각이다. 이 마지막 조각이 '왜' 쓰러지는가는 명확한데, 그것은 바로 앞의 조각 때문이며, 또한 그 앞 조각이 '왜' 쓰러지는가 역시 명확하다.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첫 번째 조각이 '왜' 쓰러지는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 또한 명확한 것이 무언가 힘의 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편, 이렇게 힘의 작용으로부터 시작하여 중간의 여러 조각들을 거쳐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조각이 '왜' 쓰러지는가 역시, 그것들이 그렇게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고 보고 있는 조각 다음에 어떠한 조각이 어떻게 쓰러질지는 정확히 모른다 할지라도, 적어도 다음에 쓰러질 조각이 있다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다.

  갑자기 꺼낸 도미노의 예는, 우리의 삶이 도미노처럼 운명지어져 있다거나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 함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성취 차원의 고민들이, 도미노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why'의 매커니즘을 간과하고 마지막으로 쓰러지는 그 조각 자체에만 신경쓴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도미노가 놓인 배치는 커녕, 바로 앞에서 쓰러지는 조각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마지막 조각만을 따로 뽑아내 어떻게 쓰러트릴지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 우리가 갖는 불안이란, 우리가 결국 쓰러트린 바로 그 하나의 조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조각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알 수 없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만약, 이와 반대로 'why'에 대한 답들을 하나씩 찾게 된다면, 역으로 목표 차원에서의 사소한 행위에서조차 의미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극단적으로 다시 한 번 예를 들자면, 막연히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은사람이 있다. 또 한 편에는, 존재의 이유를 자신이 가진 능력을 타인에에게 나누는 것으로 시각화하고, 타인을 구체적으로 배움을 얻고자 하는 학생들로 의미지어,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지에 대한 답으로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학에서 교사가 되기 위한 교직을 이수하지만, 그 성취 행위의 의미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며 갖게 되는 중대한 결정 혹은 고민들에 있어서, 목적으로부터 목표까지 관통하는 'why'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록, 개념의 사전적 정의를 분석하고 개념 간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밝힌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삶의 실재와 가지는 괴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글을 통해 이러한 작업을 실시한 것은 우리가 행하는 고민의 대상이 실제로 '무엇'인지, 그리고 '왜'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필자가 제시한 목적으로부터 목표로 향하는 과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사용한 예시들의 부적절성을 비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현실적인 고민을 하며 겪었던 답답함과 불안이 미약하나마 해소되고, 스스로에 대해 되돌아보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1월 6일 일요일

늘어나는 살에 대한 합리화 : 생존최적화와 자아최적화 - 2013. 1. 6.


  요즘 운동 부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몸이 좋지 않음을 느낀다. 동시에 각종 패스트푸드와 고열량 식품들을 섭렵하면서, 아이러니하지만 '살찌면서 야위어간다고' 하는 것이 내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묘사일 것이다. 사실 나는 상당히 마른 체격임에도 살이 찌는 것에 민감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다. 최근 오동통 살이 오른 얼굴과 나잇살이라고들 하는 뱃살로 급격히 불어난 5kg의 스트레스는 나로 하여금 다이어트를 결심케 했다.
  오늘은 가장 원초적으로 소식을 위해 점심을 김밥 한 줄로 때우기로 했는데,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의 나른함은 낮잠으로 김밥 한 줄의 열량을 내 몸에 그대로 축적시켰다. 분명 잠들기 직전까지도 밥을 먹고 바로 잠들면 늘어날 체지방을 걱정하며 절대 잠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눈꺼풀에 작용하는 중력을 거스르려 노력했지만, 어떠한 불가항력은 나를 끝내 의지가 부족한 나약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밀려오는 후회와 자괴감.
  그런데 가만, 불가항력이라. 불가항력(不可抗力) : 인간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저항해 볼 수도 없는 힘. 저항은 인간의 의지와 의식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인데, 만약 이러한 저항이 불가한 어떠한 작용에 의해 내가 수면을 취해야만 했다면 그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인간은 생의 1/3을 잠을 자면서 살아가는데, '수면'의 생물학적 의미는 '내적 원인에 의한 주기적 생리기능으로, 의식상실을 그 판정조건으로 하는 지속적 저하 상태'로서 누적된 정신적 및 신체적 피로를 회복하기 위한 주기적 활동이다. 오늘 청한 낮잠이 실은 내 의식의 작용 이전에 체내의 저장된 유전 정보에 의해 수행된 생존을 위한 행위였던 것이다. 더욱이 최근 늘어난 내 살들은 겨울철 생존과 관련해, 겨울에 인간의 몸무게가 늘어난다는 통계적 결과와 동면 이전 동물들이 미친 듯이 먹어대 살을 찌우는 행위들과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이른바 '생존최적화'를 위한 행동들로 삶을 구성한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너무나도 많은 행위들이 사실 어느 정도 생존최적화를 추구하는 DNA에 의해 선험적으로 디자인된 것이 사실이다. 한 편, 이러한 생존최적화에 대한 생각과 동시에 그 연관검색어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영역인 자아와 영혼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인간은 생존최적화와 동시에 이른바 '자아최적화'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여타 동물들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취한 나의 낮잠과 축적된 살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을 진정 불가항력의 작용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인간의 생존최적화와 자아최적화 간에는 어떠한 관계가 성립하는 것일까.

  우선 인간의 자아최적화가 생존최적화에 포함되는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생을 유지하는 것' 혹은 '영생'으로 파악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생명체로서 갖는 생존에의 욕구를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모든 행위의 전제로서 생존최적화가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으로 이성을 제시하거나 스스로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동물적 속성과 구분되는 혹은 그보다 우월한 무언가를 증명하려 노력하곤 하는데, 이보다는 인간의 동물성을 오히려 인간을 규정하는 전제로 인정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아최적화 역시 생존최적화의 일부로서 이해가 가능하다. 인간은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를 하는 가운데 일련의 생존최적화 과정 속에서 정신과 자아의 영역을 발전시킨 것이다. 종종 생존최적화를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자아최적화는 실제로 왜곡된 형태의 생존최적화 행위로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자아최적화와 생존최적화의 관계를 동등한 층위로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인간의 삶의 목적을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생을 살아가는 것'으로서 파악한다.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생존에의 욕구와 더불어 자아실현이나 정신적 욕구를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두 영역의 교집합을 일반적인 인간의 삶으로 바라본다. 이에 따라, 어느 정도 생존최적화가 상징하는 물질 혹은 육체의 영역이 자아최적화가 상징하는 정신 혹은 영혼의 영역과 다소 대립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그 과정과 의미가 앞선 관점보다 상대적으로 중요시된다. 한 편, 이러한 관점이 앞서 파악한 생존최적화 중심의 관점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벤다이어그램 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순수한 자아최적화의 영역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영역은 인간에게 있어 이상적인 가치로서 존재론적 선(善)으로 기능하게 되는데, 생존최적화를 위반하면서 자아최적화를 추구하는 행위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라는 성인에 대해 생존최적화 중심의 관점에서는 그 행위 자체가 예수 개인으로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자아최적화 중심의 관점에서는 개인의 생존을 넘어 지극한 자아실현의 경지에 도달한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관점이 생존최적화와 자아최적화의 관계를 다르게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는 두 개념이 구분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보다 해체적인 관점에서는 과연 두 개념이 서로 구분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수천 년간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기 위한 물질과 정신, 혹은 육체와 영혼의 구조를 논하기보다, 인간은 생존최적화와 자아최적화의 유기적인 결합 속에서 무한한 '선택'을 하는 존재임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인간의 '선택'은 그것이 어떠한 작용에 의한 것이든 그 자체로 의미와 목적을 가지는 유의미한 선택인 것이며, 최적화 자체가 근본적으로 선택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살에 대한 합리화 속에서 생존최적화와 자아최적화를 끌어들여 멀리 돌아왔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이러한 결과 역시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가치 있는 선택에 의해 귀결된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 있는 성찰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 덩이 더 붙어버린 살들이 역시 내게는 더 크게 다가온다. 합리화는 실패한 듯하고, 취해야 할 ‘선택’은 자못 선명해 보인다. 다이어트.

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에 대한 적극적 소외에의 권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 '상실의 시대'가 가리키듯, 소외는 안타깝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를 가장 정확히 규정하는 코드로 자리잡았다. 감정적 단절(emotional severance), 무력함(powerlessness), 고립(isolation)과 같은 개념들은 소외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문이 없는 좁은 방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는다.

  필자의 최근 고민은 삶에 있어 '하고 싶은 것, 잘 하는 것, 그리고 해야 하는 것'의 벤다이어그램에서 교집합을 찾는 것이다.


  그 과정의 첫 걸음은 각각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생각의 초점은 해야 하는 것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다. 하고 싶은 것과 잘 하는 것은 희미하고 불분명하게 보였지만,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고 이상하리 만큼 많았다. 그러다 사고의 연쇄작용은 문득 해야 한다는 것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로 이어졌다. 해야 한다는 것의 기준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정말 해야만 하는 것이 있는 걸까. 타인의 기준, 그리고 타인의 삶. 회의감.

  종이를 돌려 바라본 삶의 벤다이어그램에서 잘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분명해졌고, 해야 하는 것은 희미해졌다. 생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만큼의 불안함과 소외감이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최근 몇 일 여러 친구들과 만나 우연히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 각각의 고뇌의 무게는 나의 그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았으며, 방 속에 갇혀 자기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은 사뭇 진지했다. 요즘 유난히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고독과 외로움이 언어적 의미로가 아니라 공기 속에서 감각으로 느껴지곤 했다.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의 소외감은 커져가지만, 그 괴리 속에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각 존재의 무게 만큼 성찰과 고뇌의 밀도와 깊이가 더해져온 것을 아닐까. 다만 그것을 드러내는데 익숙지 않고 소외의 꼬리표들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옥죄어 왔을 뿐.

  언젠가부터 필자는 고민과 생각이 있을 때면 특정 어휘나 개념의 사전적 정의를 검색해보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데, 사고를 확장하는 데에 이름과 의미를 분명히 살피는 단순한 작업의 도움을 여러 번 받은 바 있다. 이번에는 사소한 발견이 소외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필자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소외 疏外 : 자기 자신이나 사회로부터의, 혹은 사회경제적 과정의 통제로부터의 자기정체감의 상실감 혹은 소원감.
<철학> [같은 말] 자기 소외.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일.

  정의 자체나 설명은 기존에 필자가 가지고 있던 느낌이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疏外라는 한자가 깨달음을 준 것이다. 疏 소통할 (소), 外 바깥, 남 (외). 한자의 정의에 따르자면 소외는 '바깥 세계 혹은 타인들과 소통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무력하고, 고립되고, 심연으로 빠져드는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소외라는 개념과 전적으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규정하는 소외는 소통의 과정과 다름 없다는 직관이 뒤따른다. 주체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소외는 필연적인 결과물이며, 일련의 소외의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개별적 존재들이 적극적으로 '外'와 소통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 때, '外'는 '內'의 인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소외는 자아와 세계를 아우르는 삶의 소통으로 파악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네의 소외감은 '소외'라는 단어의 기의(signifié)에 의해 그 이면에 존재하는 삶의 본질적 측면이 퇴색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소외는 우리로 하여금 패배감에 젖어 스스로를 속박시키는 기제가 아닌, 세상과 소통하는 우리 삶의 근본이다.

  소외감을 느끼는 모든 이들이 적극적으로 소외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2012년 9월 24일 월요일

Me in the Mirror - 2012. 9. 24.



거울 [mirror, 鏡] : 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상(像)을 맺는, 즉 물체의 모습을 비추는 도구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거울의 본질이 그러하듯, 비춰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흔히 일상적인 비유로 '삶의 거울을 들여다본다.' 함은, 자신을 돌이켜 바라봄으로써 현재 자신의 좌표를 파악하고 삶의 의미를 성찰함을 의미한다. 때로 너무나 바쁘고 여유가 없이 삶을 살다 보면, 우리는 목적 없이 표류 하는 지루한 일상 속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거울은 부유하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내면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세계 속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한다.




 혹시 옆에 거울이 있다면, 거울을 들여다 보라. 만약 거울이 없다면, 자신이 거울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 여성의 경우 화장할 때를 떠올려보면 좋을 듯 하다. 거울 속에 무엇이 보이는가? 물론 자신의 모습이 보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거울을 응시하다 보면 자기 이외의 다른 대상들이 마치 위의 사진처럼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거울을 바라보는 시간이 오래될 수록, 그리고 거울과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거울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영역은 좁아진다. 초점화된 부분은 우리에게 확대되어 다가오며, 보다 집중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만큼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은 많아지며, 자신이 바라보는 부분에 매몰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삶의 거울을 통해 파악하는 자아는 결국 그를 둘러싸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중심으로 존재한다. 비록 건조한 삶 속에서 거울을 비추어 스스로를 성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거울 속 모습에 함몰되어 나머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좌표의 기준이 되는 축을 잃는 것과 같다.

 '삶의 거울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임과 동시에,그럼으로써 시야에서 사라지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내면만을 향하는 시선이 자아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야기되는 빛의 파장과 굴절로 이어질 때에야 비로소, 거울 속에 맺힌 '나'라는 상(像)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2012년 9월 16일 일요일

어스름 속 카페 - 2012. 9. 16.


아스라이 들려오는 커피향
아늑하게 포옹하는 빛과 공기
따스히 와닿는 머그잔의 입술.

카페는
저 멀리서부터 다가와
온 몸으로 나를 감싼다.
위로...

온기에 취해 기댄 유리창은 하지만,
차갑다.
이질적인 냉기 너머로 옮겨진 시선.

사라지기 위해 터져가는 저녁놀
수줍게 막을 내리는 어둠
태양의 끝을 잡고 흘러가는 구름.

어스름은
저 멀리서부터 다가와
온 몸으로 카페를 감싼다.

그리고 소리없이 나를 감싼다.

이내 막에 가려지는 어스름 속
유리창은 어느새 온기를 머금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 태양을 품는다.
위로.

2012년 8월 21일 화요일

노래와 우연, 그리고 비애 - 2012. 8. 21.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이라면 잘 알겠지만, 노래는 내 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노래는 언제나 내 마음을 적신다.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슬프게. 나는 노래를 사랑한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항상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로 가득하다.
모든 노래를 놓치지 않고 즐기고 싶은 욕심에 나는 보통 '랜덤재생'으로 설정하여 노래를 듣는다.
오늘은 내게 음악, 그리고 이 '랜덤'의 의미가 조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노래의 매력 중 하나는 들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시간, 장소, 상황, 그리고 내 감정에 따라.
어제는,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다가왔던 노래의 가사가 갑자기 마음을 크게 울린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랜덤'하게 흘러나오던 노래들. 한 노래가 끝나고, 새로운 노래가 시작되어 들리는 전주.
갑자기 심장이 '쿵'하고 크게 뛰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연히.
'왜.... 일까?'라는 생각.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다가, '우연히' 좋아하는 노래가 나왔을 때의, 행복한 느낌.
길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 흥얼거리며 걸었던 즐거운 기억.
일상 속에서, '우연히' 나온, 노래.
내가 그토록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소중히 즐겨온 것이 '노래'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우연에서부터 직관적인 연상이 이어진다. 우연. 필연. 반복. 그리고 일상.
문득 노래의 울림보다 더 큰 일종의 배신감과 비애가 느껴진다.
어쩌면 필연적이고, 반복되는, 죽어 있는 나의 일상 속에서 ,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우연'이 아닐까. 
그리고 노래는 그러한 '우연'을 환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마약.
마약의 환각 작용은 일시적이고 결국은 금세 현실로 돌아오며 중독된다. 너무나 닮았다.
결국 '노래'는 건조한 일상 속에 매몰된 내 존재를 반증하는 것인가.

노래를 되돌려 '일부러' 다시 그 노래를 재생한다. 
아까와 같은 커다란 울림은 전혀 없다. 
시 한 번 씁쓸한 비애만이 느껴진다.

2012년 8월 19일 일요일

샛별 - 2012. 8. 20.

고개를 들어
밤 하늘을 바라봄은
별을 보기 위해서다

밤 하늘엔 별이 있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모든 별은 빛을 발하지만
내가 바라본 별빛만이
아름다움이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오늘 밤하늘의
저기 저 샛별은
누군가의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