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6일 일요일

늘어나는 살에 대한 합리화 : 생존최적화와 자아최적화 - 2013. 1. 6.


  요즘 운동 부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몸이 좋지 않음을 느낀다. 동시에 각종 패스트푸드와 고열량 식품들을 섭렵하면서, 아이러니하지만 '살찌면서 야위어간다고' 하는 것이 내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묘사일 것이다. 사실 나는 상당히 마른 체격임에도 살이 찌는 것에 민감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다. 최근 오동통 살이 오른 얼굴과 나잇살이라고들 하는 뱃살로 급격히 불어난 5kg의 스트레스는 나로 하여금 다이어트를 결심케 했다.
  오늘은 가장 원초적으로 소식을 위해 점심을 김밥 한 줄로 때우기로 했는데,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의 나른함은 낮잠으로 김밥 한 줄의 열량을 내 몸에 그대로 축적시켰다. 분명 잠들기 직전까지도 밥을 먹고 바로 잠들면 늘어날 체지방을 걱정하며 절대 잠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눈꺼풀에 작용하는 중력을 거스르려 노력했지만, 어떠한 불가항력은 나를 끝내 의지가 부족한 나약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밀려오는 후회와 자괴감.
  그런데 가만, 불가항력이라. 불가항력(不可抗力) : 인간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저항해 볼 수도 없는 힘. 저항은 인간의 의지와 의식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인데, 만약 이러한 저항이 불가한 어떠한 작용에 의해 내가 수면을 취해야만 했다면 그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인간은 생의 1/3을 잠을 자면서 살아가는데, '수면'의 생물학적 의미는 '내적 원인에 의한 주기적 생리기능으로, 의식상실을 그 판정조건으로 하는 지속적 저하 상태'로서 누적된 정신적 및 신체적 피로를 회복하기 위한 주기적 활동이다. 오늘 청한 낮잠이 실은 내 의식의 작용 이전에 체내의 저장된 유전 정보에 의해 수행된 생존을 위한 행위였던 것이다. 더욱이 최근 늘어난 내 살들은 겨울철 생존과 관련해, 겨울에 인간의 몸무게가 늘어난다는 통계적 결과와 동면 이전 동물들이 미친 듯이 먹어대 살을 찌우는 행위들과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이른바 '생존최적화'를 위한 행동들로 삶을 구성한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너무나도 많은 행위들이 사실 어느 정도 생존최적화를 추구하는 DNA에 의해 선험적으로 디자인된 것이 사실이다. 한 편, 이러한 생존최적화에 대한 생각과 동시에 그 연관검색어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영역인 자아와 영혼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인간은 생존최적화와 동시에 이른바 '자아최적화'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여타 동물들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취한 나의 낮잠과 축적된 살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을 진정 불가항력의 작용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인간의 생존최적화와 자아최적화 간에는 어떠한 관계가 성립하는 것일까.

  우선 인간의 자아최적화가 생존최적화에 포함되는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생을 유지하는 것' 혹은 '영생'으로 파악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생명체로서 갖는 생존에의 욕구를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모든 행위의 전제로서 생존최적화가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으로 이성을 제시하거나 스스로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동물적 속성과 구분되는 혹은 그보다 우월한 무언가를 증명하려 노력하곤 하는데, 이보다는 인간의 동물성을 오히려 인간을 규정하는 전제로 인정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아최적화 역시 생존최적화의 일부로서 이해가 가능하다. 인간은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를 하는 가운데 일련의 생존최적화 과정 속에서 정신과 자아의 영역을 발전시킨 것이다. 종종 생존최적화를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자아최적화는 실제로 왜곡된 형태의 생존최적화 행위로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자아최적화와 생존최적화의 관계를 동등한 층위로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인간의 삶의 목적을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생을 살아가는 것'으로서 파악한다.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생존에의 욕구와 더불어 자아실현이나 정신적 욕구를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두 영역의 교집합을 일반적인 인간의 삶으로 바라본다. 이에 따라, 어느 정도 생존최적화가 상징하는 물질 혹은 육체의 영역이 자아최적화가 상징하는 정신 혹은 영혼의 영역과 다소 대립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그 과정과 의미가 앞선 관점보다 상대적으로 중요시된다. 한 편, 이러한 관점이 앞서 파악한 생존최적화 중심의 관점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벤다이어그램 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순수한 자아최적화의 영역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영역은 인간에게 있어 이상적인 가치로서 존재론적 선(善)으로 기능하게 되는데, 생존최적화를 위반하면서 자아최적화를 추구하는 행위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라는 성인에 대해 생존최적화 중심의 관점에서는 그 행위 자체가 예수 개인으로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자아최적화 중심의 관점에서는 개인의 생존을 넘어 지극한 자아실현의 경지에 도달한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관점이 생존최적화와 자아최적화의 관계를 다르게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는 두 개념이 구분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보다 해체적인 관점에서는 과연 두 개념이 서로 구분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수천 년간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기 위한 물질과 정신, 혹은 육체와 영혼의 구조를 논하기보다, 인간은 생존최적화와 자아최적화의 유기적인 결합 속에서 무한한 '선택'을 하는 존재임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인간의 '선택'은 그것이 어떠한 작용에 의한 것이든 그 자체로 의미와 목적을 가지는 유의미한 선택인 것이며, 최적화 자체가 근본적으로 선택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살에 대한 합리화 속에서 생존최적화와 자아최적화를 끌어들여 멀리 돌아왔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이러한 결과 역시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가치 있는 선택에 의해 귀결된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 있는 성찰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 덩이 더 붙어버린 살들이 역시 내게는 더 크게 다가온다. 합리화는 실패한 듯하고, 취해야 할 ‘선택’은 자못 선명해 보인다. 다이어트.

댓글 2개:

  1. 결국 다이어트하자는 말이넹 ㅋㅋ
    말 참 잘한다... ㅋㅋ 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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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결론은 역시 그렇게 되더라 .... 의미 있는 선택이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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