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에 대한 적극적 소외에의 권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 '상실의 시대'가 가리키듯, 소외는 안타깝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를 가장 정확히 규정하는 코드로 자리잡았다. 감정적 단절(emotional severance), 무력함(powerlessness), 고립(isolation)과 같은 개념들은 소외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문이 없는 좁은 방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는다.

  필자의 최근 고민은 삶에 있어 '하고 싶은 것, 잘 하는 것, 그리고 해야 하는 것'의 벤다이어그램에서 교집합을 찾는 것이다.


  그 과정의 첫 걸음은 각각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생각의 초점은 해야 하는 것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다. 하고 싶은 것과 잘 하는 것은 희미하고 불분명하게 보였지만,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고 이상하리 만큼 많았다. 그러다 사고의 연쇄작용은 문득 해야 한다는 것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로 이어졌다. 해야 한다는 것의 기준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정말 해야만 하는 것이 있는 걸까. 타인의 기준, 그리고 타인의 삶. 회의감.

  종이를 돌려 바라본 삶의 벤다이어그램에서 잘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분명해졌고, 해야 하는 것은 희미해졌다. 생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만큼의 불안함과 소외감이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최근 몇 일 여러 친구들과 만나 우연히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 각각의 고뇌의 무게는 나의 그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았으며, 방 속에 갇혀 자기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은 사뭇 진지했다. 요즘 유난히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고독과 외로움이 언어적 의미로가 아니라 공기 속에서 감각으로 느껴지곤 했다.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의 소외감은 커져가지만, 그 괴리 속에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각 존재의 무게 만큼 성찰과 고뇌의 밀도와 깊이가 더해져온 것을 아닐까. 다만 그것을 드러내는데 익숙지 않고 소외의 꼬리표들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옥죄어 왔을 뿐.

  언젠가부터 필자는 고민과 생각이 있을 때면 특정 어휘나 개념의 사전적 정의를 검색해보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데, 사고를 확장하는 데에 이름과 의미를 분명히 살피는 단순한 작업의 도움을 여러 번 받은 바 있다. 이번에는 사소한 발견이 소외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필자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소외 疏外 : 자기 자신이나 사회로부터의, 혹은 사회경제적 과정의 통제로부터의 자기정체감의 상실감 혹은 소원감.
<철학> [같은 말] 자기 소외.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일.

  정의 자체나 설명은 기존에 필자가 가지고 있던 느낌이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疏外라는 한자가 깨달음을 준 것이다. 疏 소통할 (소), 外 바깥, 남 (외). 한자의 정의에 따르자면 소외는 '바깥 세계 혹은 타인들과 소통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무력하고, 고립되고, 심연으로 빠져드는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소외라는 개념과 전적으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규정하는 소외는 소통의 과정과 다름 없다는 직관이 뒤따른다. 주체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소외는 필연적인 결과물이며, 일련의 소외의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개별적 존재들이 적극적으로 '外'와 소통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 때, '外'는 '內'의 인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소외는 자아와 세계를 아우르는 삶의 소통으로 파악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네의 소외감은 '소외'라는 단어의 기의(signifié)에 의해 그 이면에 존재하는 삶의 본질적 측면이 퇴색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소외는 우리로 하여금 패배감에 젖어 스스로를 속박시키는 기제가 아닌, 세상과 소통하는 우리 삶의 근본이다.

  소외감을 느끼는 모든 이들이 적극적으로 소외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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