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7일 화요일

어제 오늘 그리고 : 목적, 비전, 사명, 목표 - 2013. 5. 7.

1.
  언젠가부터 지인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털어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필자는 운이 좋게도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생각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인생에 대한 고민에 대해서는 물론 정답도 없거니와 답을 해줄 능력도 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레 본인은 듣는 것에 집중하며 사람들이 던지는 고민 자체를 고민하게 되었다. 여러 주체들의 인생의 폭과 깊이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들의 고민은 신기할 정도로 하나의 진부한 이미지로 수렴했으니,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처럼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며 위태롭게 흔들리는 돗단배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필자 본인의 모습이기도 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이미지를 글로 풀어보자면, 방향의 상실 혹은 불확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한 편, 이러한 표현이 문제의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토대라면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고민은 '성취'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었다. 무언가 목적한 바를 이룬다는 뜻의 성취의 문제가 어떻게 인생에 있어 방향의 상실로 연결되며, 우리에게 불안을 야기하는지를 고민하던 찰나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목적이란 과연 무엇일까?

  목적, 비전, 사명, 목표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다양하게 사용하는 어휘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각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네 가지 개념 모두 주체의 성취 행위와 관련이 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지만, 구체적인 의미와 행위의 단계 측면에서 차이점을 갖기 때문에 각각의 사전적 정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목적은 각 개념에 대한 필자의 성찰을 공유함으로써, 독자들이 성취와 관련해 살면서 갖게 되는 답답함과 불안을 해소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화두를 던지고자 함이다.

2.
  우선 ‘목적’은 ‘실현하려고 하는 일이나 나아가는 방향’을 의미한다. ‘목적’의 번역어라 할 수 있는 ‘purpose’의 사전적 정의는 ‘The purpose of something is the reason for which it is made or done.’이다. 이 때, ‘이유’ 혹은 ‘근거’를 의미하는 ‘reason’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그 정의를 파악해보면, ‘목적’이란 주체가 존재하고 만들어진 이유에 관한 존재론적 인식이다. ‘목적’은 한자로 ‘目的’인데 여기서 ‘的’은 구체적으로는 과녁을 나타내고, 내포적으로는 ‘참, 진실’을 의미한다. 화살을 쏘는 행위에 있어 과녁이란 활쏘기가 존재하기 위한 이유로서, 그 전체의 과정을 관통하는 궁극의 지점이자 존재론적 선(善, 옳음)의 가치를 갖게 된다. 결국 ‘목적’이란 그 존재 자체에 관한 답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전’은 사전상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 이상, 전망’을 의미하며, 그 번역어인 ‘vision’은 ‘Your vision of a future situation or society is what you imagine or hope it would be like, if things were very different from the way they are now.’을 사전적 정의로 한다. ‘비전’의 한글과 영문의 정의에서 공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개념은 ‘시점’과 ‘시각화’이다. 즉, ‘비전’은 기본적으로 현재 시점에서 미래의 상황을 시각화시킨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한 편, 시각화라는 개념에는 비전을 도출해내는 대상이 추상적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비전의 개념을 위에서 살펴본 목적의 정의와 연결시켜 이해해보면, 비전은 현재라는 시점과 목적으로 ‘나아가는 방향 혹은 과정’이라는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궁극의 존재 이유라는 미래의 추상적 상황을 가시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시각적으로 그려내는 과정 속에는 주체의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에, 비전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관념적 속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에서 관념이란 '목적'의 추상적인 존재론적 질문과 답을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나타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시각화’의 개념과 모순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사명’은 한글로는 ‘맡겨진 임무’를 의미하며, 번역어인 ‘mission’의 사전적 정의는 ‘A mission is an important task that people are given to do.’이다. ‘사명’이라는 개념 역시 한글과 영어의 정의에서 공통적인 개념이 도출되는데, 그것은 ‘임무’와 ‘주어짐’이다. 즉 사명이란 관념적 측면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한 것이며, 이는 행위의 주체에게 주어지게 된다. 이 때, 사명을 갖는 주체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비전’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명은 한자로 ‘使命’인데 ‘使’는 ‘하여금’이라는 사역형을 나타내고 ‘命’은 ‘목숨, 운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달리 말하면, 사명이란 주체로 하여금 무언가를 운명처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주체의 신념과 믿음을 근간으로 하게 되며 이는 이념과 같은 관념의 작용에 기인하는 것이다. 바로 사명이란 그 한글 정의에서 ‘비전에 의해’라는 말이 앞에 생략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목표’는 사전에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지향하는 실제적 대상으로 삼음. 또는 그 대상.’으로 정의하며, 번역어인 ‘goal’은 ‘Something that is your goal is something that you hope to achieve, especially when much time and effort will be needed.’을 의미한다. ‘목표’에서는 정해진 대상에 대한 실제적인 성취를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 목표는 한자로 ‘目標’인데 ‘標’는 ‘표하다, 나타내다’라는 의미로,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실행 가능한 행동의 차원으로 나타내는 것을 가리킨다. 목표를 사명의 개념과 연결시켜보면, 주체가 자신에게 비전에 의해 주어진 임무를 인식하고, 이를 실질적인 성취 행위 차원에서 나타낸 것을 ‘목표’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각 개념들의 차이를 사전적 정의를 통해 분석한 결과, 목적, 비전, 사명, 목표는 주체가 지향점을 성취해가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구성하는 각기 다른 차원의 개념 집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목적, 비전, 사명, 목표의 순으로 나아갈수록 추상적 차원에서 구체적 차원으로, 관념적 차원에서 행위적 차원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단기적 관점으로 구분됨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목적에서 목표로 나아감에 있어, 각각 그 상위 혹은 전위 차원의 개념은 그 하위 혹은 후위 차원의 개념의 전제로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상위 개념은 하위 개념의 ‘why’에 대한 답이고, 하위 개념은 상위 개념의 ‘how’에 대한 답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3.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하고 있는 고민들의 한계는 단지 현상적인 목표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목표에 대해 'why'를 묻지 않고, 계속해서 'how'를 생각한다. 목표의 'why'에 대한 답, 즉 '사명'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비록 'how'를 찾아 그 목표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이는 하나의 독립적인 사건(event)에 불과할 뿐 인생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기 힘들다. 우리가 갖는 불안과 답답함은 목표의 'why'로서 사명, 사명의 'why'로서 비전, 비전의 'why'로서 목적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데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하는 성취의 고민은 최상위의 목적으로 거슬러 올라간 뒤, 다시 목표의 차원으로 내려올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가령 아름다운 모양을 이루며 무한히 계속되는 도미노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지금 쓰러지고 있는 가장 마지막 도미노 조각이다. 이 마지막 조각이 '왜' 쓰러지는가는 명확한데, 그것은 바로 앞의 조각 때문이며, 또한 그 앞 조각이 '왜' 쓰러지는가 역시 명확하다.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첫 번째 조각이 '왜' 쓰러지는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 또한 명확한 것이 무언가 힘의 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편, 이렇게 힘의 작용으로부터 시작하여 중간의 여러 조각들을 거쳐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조각이 '왜' 쓰러지는가 역시, 그것들이 그렇게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고 보고 있는 조각 다음에 어떠한 조각이 어떻게 쓰러질지는 정확히 모른다 할지라도, 적어도 다음에 쓰러질 조각이 있다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다.

  갑자기 꺼낸 도미노의 예는, 우리의 삶이 도미노처럼 운명지어져 있다거나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 함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성취 차원의 고민들이, 도미노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why'의 매커니즘을 간과하고 마지막으로 쓰러지는 그 조각 자체에만 신경쓴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도미노가 놓인 배치는 커녕, 바로 앞에서 쓰러지는 조각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마지막 조각만을 따로 뽑아내 어떻게 쓰러트릴지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 우리가 갖는 불안이란, 우리가 결국 쓰러트린 바로 그 하나의 조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조각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알 수 없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만약, 이와 반대로 'why'에 대한 답들을 하나씩 찾게 된다면, 역으로 목표 차원에서의 사소한 행위에서조차 의미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극단적으로 다시 한 번 예를 들자면, 막연히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은사람이 있다. 또 한 편에는, 존재의 이유를 자신이 가진 능력을 타인에에게 나누는 것으로 시각화하고, 타인을 구체적으로 배움을 얻고자 하는 학생들로 의미지어,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지에 대한 답으로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학에서 교사가 되기 위한 교직을 이수하지만, 그 성취 행위의 의미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며 갖게 되는 중대한 결정 혹은 고민들에 있어서, 목적으로부터 목표까지 관통하는 'why'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록, 개념의 사전적 정의를 분석하고 개념 간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밝힌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삶의 실재와 가지는 괴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글을 통해 이러한 작업을 실시한 것은 우리가 행하는 고민의 대상이 실제로 '무엇'인지, 그리고 '왜'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필자가 제시한 목적으로부터 목표로 향하는 과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사용한 예시들의 부적절성을 비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현실적인 고민을 하며 겪었던 답답함과 불안이 미약하나마 해소되고, 스스로에 대해 되돌아보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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